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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필자의 키부터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필자는 L양이 정한 최소 신장기준을 통과했으니, ‘루저(loser)’는 아닙니다. 

최근 KBS2 TV,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한 한 여대생의 ‘키 작으면 루저' 발언으로 인터넷이 시끌시끌합니다. 자신의 키가 162㎝라고 밝힌 한 30대 남성은 KBS를 상대로 1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신청했습니다. '미수다’ 제작진이 지난 12일 홈페이지에 해명문을 게재했지만, 격앙된 일부 네티즌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지난 9일 방송에 게스트로 나온 L양은 키 작은 남자와 교제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키가 작으면 일단 싫다. 외모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키가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한다. 180㎝는 돼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참 당돌한 발언입니다. 여기서 ‘당돌하다’는 건 두 가지 의미인데, 첫째, 남자의 키가 절대적 기준이라고 믿는 그 생각의 강도가 그렇고, 둘째, 그런 당돌한 생각을 공중파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참 생각이 없는 거죠. 하지만 L양의 발언은 요즘 젊은 여성들의 평균적 생각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L양은 공중파에서 그런 발언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지, 상당수 젊은 여성들이 평소 맞장구를 치며 그런 대화를 나눴을 것입니다. 아닐 수도 있지만, 필자는 그럴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일부 네티즌들은 젊은 여성들의 이런 속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격앙된 것일까요. 혹은 알면서도 위선을 떠는 것일까요.

L양이 희생양이 돼 뭇매를 맞고 있지만, 현실은 외모가 경쟁력인 세상입니다. L양은 비록 경솔했지만, 자신이 보고 느낀대로의 진실을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네티즌들은 여기에 즉각적으로 반발했지요. 비록 현실에서는 외모가 절대적 기준이더라도, 그건 옳지 않다고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현실에서 무너진 가치관을 적어도 인터넷에서는 바로 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인터넷이 여전히 ‘공론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번 ‘공론장’에서 확인한 사실은 사람을 외모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은 공론의 장이 되기도 하지만, 공공연한 폭력이 벌어지는 시장바닥이 되기도 한다. 최진실을 잊지 말자


문제는 그런 공론을 확인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점입니다. L양의 미니홈피와 그녀가 다니는 대학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비난과 저주의 글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일부 네티즌들은 L양의 과거 사진과 경력 등을 하나, 둘씩 찾아내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공론의 장은 얼굴없는 다수의 군중이 철없는 발언으로 궁지에 몰린 한 젊은 여성에게 돌아가며 침을 뱉고, 욕을 퍼붓는 시장바닥이 돼 버립니다. 이런  모욕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L양은 미니홈피에 해명글을 올렸다가 벌떼처럼 달려드는 흥분한 군중 때문에 홈피를 폐쇄했습니다. 이어 지난 12일에는 자신의 학교 게시판에 해명글을 올렸습니다.

이번 ‘루저 발언’을 계기로 인터넷에서 여전히 올바른 가치관이 존중받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이번 사건이 최진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이버테러로 번지지 않도록 다시 한번, 인터넷의 공론장 기능을 활성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정작 문제삼아야 할 것은 미숙한 실수를 저지른 L양이 아니라 방송사입니다. KBS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신청을 한 30대의 키 작은 남자는 “‘미수다`가 키 작은 남자에 대한 비하 발언을 여과없이 방송해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생방송도 아닌 녹화방송에서 이런 발언을 편집 없이 방송할 수 있느냐"고 항변했습니다.

아래에 버젓이 자막까지 깔아놓고, 시청률 장사 좀 하려는 얄팍한 속내를 보여주는 화면


이 분의 항변에 100% 동감합니다. 정말 생각이 없는 건 녹화방송인데도 문제의 발언을 그대로 내보낸 제작진입니다. ‘미수다’ 제작진은 지난 12일 올린 해명문에서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표현과 관련해 제작진 모두가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길 의도는 전혀 없었고, 출연자들의 솔직한 의견을 들어봄으로써 요즘 신세대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좋게 넘어가려 해도, 이건 치졸한 변명입니다. 실제 방송화면을 보면, L양이 문제의 발언을 할 때, 화면 아래에 ‘루저’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나옵니다. 편집과정에서 L양의 발언을 의도적으로 키운 것입니다. L양의 쇼킹한 발언으로 시청률 장사를 해 재미 좀 보겠다는 얄팍한 계산이 있었던 거죠.  

TV속의 이런 연예인들을 보면서 좌절감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고 보면,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주범은 TV였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남성연예인의 ‘식스팩 복근’, ‘초콜렛 복근’ 등을 보여주면서 남성들의 뱃살을 저주했던 것이 TV였습니다.
 
‘꿀벅지’니, ‘동안(童顔)’이니 하면서 ‘이래도 성형수술 안 받을거냐’고 여성들을 협박한 것도 역시 TV입니다. 이런 무차별적인 저주와 협박 속에 제 정신 박힌 사람도 생각이 바뀔 판인데, 20대 초반인 L양이 버틸 재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번 ‘루저 발언’에 대해 정말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할 사람은 L양이 아니라, 틈만 나면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방송사 제작진이라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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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쩜영